<책 정보>
삼체 1~3부 (구판; 2013, 2016, 2019)
-저자: 류츠신 지음. 이현아, 허유영 옮김
-출판사: 단숨
-분야: SF
- 우주의 장대한 생애 속 문명의 장엄한 숙명
- 1년 전쯤, 지금은 이직한 친한 회사 상사가 추천해준 책. 내가 읽기로 마음먹은 책들이 밀려있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잘 만든 작품이다. 각 권 내에서의 완결성과 복선회수가 기막힐 정도로 정교하게 설게되어 있고, 막대한 분량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1부 400쪽, 2부 600쪽, 3부 800쪽) 몰입도가 높아 한 권 한 권을 순식간에 읽게 된다. 물론 책이 넘어갈수록 점점 분량이 늘어나는 것이 보이니 다음권을 필 때는 망설이게 되지만...개인적으로는 2부에서 그런 느낌을 크게 느꼈다.
- 번역서지만 번역이 매우 잘 되어있어 읽으면서 어색한 부분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도 장점이다. 마치 한국 소설가가 처음부터 한글로 쓴 책인 것처럼 여러 묘사들이 자연스럽고 감각적이다. 인명이나 지명이 중국인이 아니었다면 중국 소설이라고 느끼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
- 작품의 스케일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내가 아는 한 SF소설에서 가장 컸던 스케일은 종(인류) 혹은 행성/문명의 모든 흥망성쇄를 다루는 정도였었는데, 이 소설은 아예 그 정도를 넘어 우주의 생애까지 다뤄버린다. 스케일이 1부에서 3부로 갈수록 점차 커지는데, '1부: 인류가 알고 있는 과학법칙에 대한 의문 → 2부: 외계문명과의 조우와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 → 3부: 우주 문명들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우주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SF 장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하드SF 또는 코스믹 SF라고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물론 단점이라기 보다는 아쉬운 점은 몇 가지 있다. 우선 첫번째로는 앞 책에서 다뤘던 핵심소재가 그 책 안에서만 끝나고 시리즈 전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1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설정은 항세기와 난세기인데, 그 소재가 2부에서는 과거회상에서만 잠깐 다뤄질 뿐이고 3부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2부의 경우에도 다양한 과학적 설정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2부 내에서만 완결된 후 3부에서는 활용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굳이 3개의 책을 다 읽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물론 1부 - 2부 - 3부가 모두 연결된 내용이고, 후속작으로서의 연결고리는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이상의 연결성은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라 2부까지만 읽어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물론 3부의 완성도는 훌륭하다.
- 두 번째는 외계종족에 대한 외향적 묘사에서 인간과 구분되는 특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삼체 시리즈에서 인간과 유의미한 교류가 있는 종족은 삼체 종족이라고 봐야 하는데, 이들이 인류를 식민지배까지 함에도 이 종족에 대한 외형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의인화된 지자 정도인데, 지자의 외견은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이 인간의 문명에 집중하기 위한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외계종족에 대한 설정을 충분히 구상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쉽다.
- 정말 엄청난 스케일을 가졌으면서도 완성도까지 매우 뛰어난 SF 소설. 엄청난 두께 때문에 손 대기가 꺼려질 수도 있지만 2부까지만 읽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해보면 상대적으로 마음 편하게 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조차 힘들다면 넷플릭스로 보는 방법도 있다. 아무튼 추천.
<내용>
삼체 1부(왕먀오 박사, 스창, 예원제)
"사람 소리도 모두 끊긴 깊은 밤, 이어폰으로 우주에서 전해지는 생명이 없는 소리를 듣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그 별들보다 더 영원한 것 같았어. 때로 그 소리는 다싱안링의 겨울에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 같이 차가워."
- 대기층이 사라져 하늘도 검게 변했고 삼체 세계에서 우주로 흡수된 모든 것이 태양 빛을 반사하며 우주에 찬란한 성운을 만들었다. 이 성운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태양으로 향했다. 그때 왕먀오는 태양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른 두 개의 태양이었다. 그들은 첫 번째 태양 뒤에서 일부분을 드러냈다. 이 방향에서 보니 중첩된 세 개의 태양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눈 같았다.
- 거대한 달은 육안으로도 관찰할 수 있는 속도로 광활한 하늘을 빠르게 스쳐갔다. 이 과정에서 거대한 달은 보름달에서 반달로, 다시 초승달로 변했다. 노인의 느릿느릿한 바이올린 소리가 차가운 새벽바람 속을 날아다녔고, 그것은 다시 우주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해갔다. 왕먀오는 아름다운 두려움 속에 빠져들었다. 거대한 초승달이 아침 햇살 속에 환하게 빛나다가 졌다. 지평선 위에 달이 두 개의 은색 뿔로만 남자 왕먀오는 그것이 태양을 향해 달려가는 거대한 소뿔 같다고 생각했다.
- 기하 형태가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거인 아이가 하늘에 블록을 흩어놓은 것 같았다. 기하 형태가 반사하는 햇빛이 지면의 밝기를 두 배 증가시켰고 불규칙하게 반짝거렸다. 거대한 진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좌우로 흔들렸다.
- 그곳에서 연기 기둥이 솟았다. 빛 송곳의 불균형한 열량으로 생긴 회오리바람이 하늘 끝까지 솟은 먼지기둥을 만들어내 빛 송곳을 둘러싸며 춤을 추었다.
"지구인과 삼체인의 기술수준 차이가 클까, 아니면 메뚜기와 우리의 기술 차이가 클까? 나는 자네들이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군."
- 서쪽 하늘가에서 석양이 녹아내리듯 운해 아래로 가라앉았다. 운해에 태양의 피가 퍼지면서 장엄한 선홍빛이 떠올랐다. "이것이 인류의 석양이다......." 예원제가 조용히 말했다.
삼체 2부(뤄지 박사, 스창)
- 바깥은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햇빛이 스민 커튼 위로 드리운 그녀의 실루엣이 마치 은막에 비친 우아한 그림자 같았다.
- 창밖을 휘지르는 거센 눈발을 쳐다보았다. 눈보라가 도시의 소음을 모두 삼키고 유리 위 눈꽃을 스치며 모래처럼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바깥은 눈보라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도 존재하지 않고 기숙사만 끝없는 설원 위에 덩그마니 서 있는 것 같았다.
- 유리로 된 둥근 어항 속에서 금붕어가 햇빛을 받으며 너울대는 불꽃처럼 헤엄쳐 다녔다.
- 그는 밤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별빛 바다가 소용돌이를 이루며 휩쓸리다가 은색 물결이 되어 어지럽게 요동쳤다. 선끗한 냉기가 투명한 번개처럼 순간적으로 그의 몽롱한 의식 위로 내리꽂히며 모든 것을 밝혔다. 그는 계속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머리 위에서 넘실대는 밤하늘이 얼음이 깨진 구멍만큼 작게 뭉쳐져 어룽거리는 빛무리가 되었다. 잉크 같은 어둠과 추위가 그를 에워쌌다.
- 은빛 광륜이 달빛을 잃고 어둠 솓에 묻혔다. 탑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창백한 달빛이 바닥을 비추자 피가 검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기거갔다. 프란체스가 탑을 빠져나올 때 성 안팎의 소리도 멎었다. 최후의 일전을 앞둔 고요함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이 대지와 바다를 뒤덮었다.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 우주가 암흑의 숲이라는 사실을 인류가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은 문명이 성숙하지 못해 우주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에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
- 태양이 사라졌는데도 당신의 아이는 어째서 무서워하지 않는가? "무서워할 필요가 없죠. 내일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는 걸 아니까요."
삼체 3부(청신, 원톙민, 지자, 웨이드, AA)
-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황금색 보리밭이었다. 밭은 300제곱미터쯤 되어 보였으며 보리가 잘 자라 수확할 때가 거의 된 것 같았다. 밭의 흙이 조금 신기했다. 순흑색 과립결정이 햇빛을 반사해 땅 위에 수많은 별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태평양이 매끈한 거울처럼 태양빛을 반사시키고 그 위에 떠 있는 구름층은 거울에 붙은 순백의 비누거품 같았다. 그 위치에서는 태양이 지구보다 훨씬 작게 보였기 때문에 검푸른 세상에서 막 탄생한 눈부신 황금 알 같았다. 내양이 완전히 지평선을 떠나자 태양을 향하고 있는 지구면이 거대한 하현달 형태로 밝아졌다. 이 거대한 반달이 지구의 나머지 부분을 그늘에 파묻어버릴 만큼 휘황찬란했다. 둥근 태양과 그 아래 구붓하게 이지러진 달이 우주에 뜬 거대한 기호 같았다.
- 어느 시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파는 물건들도 모두 허공에 뒤엉켜 있었다. 전등 몇 개가 그 속을 떠다니며 어스름한 빛을 비추고 손님과 장사꾼들도 그 빛에 의지해 떠다녔다.
- 수많은 이들이 남기고 간 낙서가 농밀한 색채감과 자유분방한 개성을 발산하며 어른거리는 빛 속에서 살아 꿈틀대는 듯했다. 그것들은 마치 그 위에 떠 있는 도시에서 가라앉은 꿈들인 것 같았다.
- 하늘에서 칠흑같은 어둠이 걷히고 은은한 보랏빛이 감돌았다.
- 3차원 세계의 태양은 떨어졌지만 2차원 평면 속의 태양은 점점 떠올랐다. 2차원 항성의 빛이 2차원 평면 안을 비추며 2차원 태양계에 처음으로 햇빛이 들었다. 2차원화된 해왕성, 토성, 지구, 수성에서 태양을 향하고 있는 쪽이 햇빛을 받아 황금빛 호를 그렸다.
- 평면에서 내뿜은 빛이 주위의 빌딩 숲에 부딪혀 수많은 빛기둥으로 쪼개진 뒤 중심축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었다.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거대한 바퀴처럼 우주 도시가 2차원 평면의 바다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2차원 평면이 배 안으로 스며든 물의 수면처럼 빠르게 상승하며 평면에 닿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2차원으로 만들어버렸다. 빌딩 숲이 밑에서부터 나란히 잘리며 2차원 단면의 형태로 우주 도시 끝까지 뻗어나갔다. 밑에서부터 차오르며 빠르게 확장되는 2차원 평면 위에서 현란한 색채와 복잡한 구조가 번개처럼 사방으로 확 퍼져나갔다. 2차원 평면이 마치 빠르게 내달리는 형형색색의 짐승들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렌즈가 된 것 같았다.
- 내가 걸어온 길은 사실 문명이 걸어온 길이다. 모든 문명이 작은 요람에서 깨어나 아장아장 걸어 나온 뒤 날아오르게 되고, 점점 빠르고 멀게 날다가 결국 우주의 운명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지적 존재의 문명은 결국 그들이 가진 생각의 크기만큼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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